(우리의 구원은 엎어질 수 있는가 에 대하여)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인한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수 있느냐 가 얼마전 한 지인과의
열띤 논쟁적 주제였습니다.
그 분은 칼빈주의의 예정설을 반대하는 입장 이었고, 위의 구절을 가지고 분명 바울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 구절을 이용한다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영접한 사람이
구원을 못 이룬 다는 것도 되는 것 임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하나님의 은혜 임으로
절대 엎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학부때나 지금 미국 대학원 모두 알미니안 주의 교단에서 공부하지만
그렇다고 칼빈의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설이 얼토 당토 안한
악마의 교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 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면
"그럼 우리가 전도할 필요도 없고, 맘대로 살아도
결국엔 하나님이 날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네"라고 생각하고 헛점을 파고 드는것은
논리적 오역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론도출, 이것을 통한 칼빈주의 공격과 이용은 너무나도 어리석고
칼빈주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편협한 생각입니다.
이부분은 또 차차 생각을 정리해서 다루고 싶습니다.
어 쨌든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를 베푸시고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 다면
영원한 대속의 역사안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값싼 은혜, 4영리로 얻은 5분 만의 구원,
그 어떤 부정적인 부분의 폐단을 예로 든다 해도 그 사람이
구원의 확신과 성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인이라면 구원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어떤 때 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시간이 얼마만에
이루어졌느냐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안에 진심으로 회개와 참회로 인한 회심이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옆의 추악했던 범죄자도 그 짧은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서 2:12 절의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이란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으로 비유한 전체적 성화의 과정이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문맥에서의 구원을 한번 받은 구원이 소멸될 수도 있다라고 해석하는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그 구절 위 부분 살펴보면 예수그리스도 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어떤 사명을 감당했는지 먼저 바울은 설명 하고 있습니다.
그 소명부터 성화에 이루는 전체적인
구원의 과정을 그리스도 의 삶으로 대신 설명 합니다.
그리고 12절에 "그러므로"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구절에서 구원은 신학적으로 구원, 모든 개념의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구원의 단계와 과정은 교단마다 교리마다 용어는 조금씩 다른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과정 즉,
소명(Calling)-중생(regeneration)-회심(conversion).
신앙(faith)-칭의(justification)-성화(sanctification)-영화(glorification) 가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헬라어 원문에 보면, 그러므로 이후에 "카도스" 란 말이 나옵니다.
의미는 ~처럼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처럼~ 이란 말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입고, 우리 인생안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라는 말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13절에 이어지는 부분도 이 소명을 잘 나타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가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구절을 구원 하나의 회심 사건, 그러므로 구원을 지키지 않으면 엎어질 수 있다라는 말로 해석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미 인치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 구원의 성숙한 한단계 한 단계 이르러서 영화에 이르는 것 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이제 소명을 감당하라는 말로 이해 하는게 더 바울의 의도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요즘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외치는 극단적 사고의 믿음과 잘못된
리더자들이 우리의 구원론을 흔들고 있습니다.
휴거 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말세 징조들을 제시하여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이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마치 우리의 구원은 말세에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휴거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잘 못된 믿음을 무차별적 수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내일 오실 수도 있는 것이지만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축제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사지가 찢겨 짐승에게 당할 7년 환난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무서워 주님을 기다린 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믿음입니다.
이 부분들의 주제들을 계속해서 나름 정리하여 적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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