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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협소한 서재

<Christless Christianity> 마이클 호튼

by souljm 2017. 1. 5.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서평



 

 한 학기 현대 신학의 흐름과 현대 교회 운동들을 공부하면서 참고도서로 채택된 마이클 호튼 교수의 책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상당히 흥미롭고 현대교회들, 특별히 이머징교회 운동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거침없는 책이라 할 수 있었다. 특별히 현대 미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 즉, 더 이상 복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자아실현과 행복을 위한 도구화 시켜 버리는 실상에 대해서 따끔하게 충고하며 주의를 주고 있다. 문체는 강렬했고, 다소 거칠었으나, 읽는 동안, 내가 주의하고 집중하지 않았던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대형교회, 그리고 소위 요즘 주목 받고 있는 Mega Churches 의 일변도인 교인맞춤형 제도, 더 이상 죄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 현실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비판적 생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현상을 미국 교회의 고질적 질병, 증상이라고 까지 표현 하는 저자는 비평과 냉소적 판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영향에 있어서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할 방안과 길을 연구를 통해 많은 역사적 선배 신학자들의 조언과 구체적 성경적 근거로 모색하고 제시한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서평을 하면서 마이클 호튼 교수가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흔들리고 있는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의 위험한 신학적 특징과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을 다시 재평가 하고 상기하며 적어 보려 한다. 또한 호튼 교수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일정 부분 내가 동의하지 않고 인정 되기 어려운 부분을 다시 조명, 비판하고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며 서평을 하려 한다.

     먼저 저자는 현재 기독교와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히 알고 대처 할 것을 요구 한다. 펠라기우스 주의는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이야기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으로 표현 되는데, 이것의 내용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길 원하신다. 셋째로, 인생의 오직 목적은 인간의 행복추구 이며 스스로를 인생 동안 성장 시키는 것이다. 넷째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필요에만 직접 개입하시며 다섯째, 선하게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위의 펠라기우스 내용에 대해 호튼 교수는 미국교회는 오히려 완전한 펠라기우스 형이 아닌 반 펠라기우스라 전제한다. 이것은 또 다른 한 형태의 자율적 신앙과 영적인 무기력 증이라 경고 하고 있다. 2 대 각성 이후 미국교회가 철저하게 반 펠라기우스 주의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그의 선구주자로는 루터 파 교회와 개혁교회 평신도 들 그리고 로버트 슐러 박사나 빈센트 필 과 같은 개혁교회 목사들의 영향으로부터 왔음을 배제 할 수 없다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학자들이 대학교단에서 새로운 신학적 인물들과 목회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으며,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 그리고 신학자 들이 비판적인 사고와 냉철한 분석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18세기 이후부터 개혁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복음전도에 있어서 죄의 대가와 구원, 은총의 영역은 다루어 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교회로써는 부흥에 초점을 맞춘 부흥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가 지금의 미국 기독교라 꼬집는다. 저자는 책에서 위튼 교수의 동일한 연구결과에 주목하면서 첫째 능력과 거룩함의 초월적인 하나님은 가벼운 친근함으로 전락한다. 열명의 미국인 중 오직 한 명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해 보았다고 말하는 반면, 대부분 하나님을 하나같이 친구로 본다. 두 번째, 죄의 구속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범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적의 혹은 죄책의 상태가 아니라 나쁜 기분을 해소 하는 답이 된다. 설교와 성례라는 수단을 통해 드러나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가장 효과적인 단계와 기법들을 통해서 효력을 나타내는 자의 목으로 돌아간다.” <Page 76 > 이 의미는 즉 이러한 펠라기우스 주의 사고 안에 갇혀 있는 현대 기독교 인들은 내면의 상태를 더 초점을 둔다. 그리하여 더 이상 교회 내에서 설교가로부터 죄인과 암흑에서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치우치지 않고, 이 사회와 현실에서 어떻게 나의 소망을 이룰 것인가? 그리고 내 내면의 평화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유지 할 수 있을 것인가 더 초점을 맞춘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 하자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목적과 복음의 전도, 선교적 관점이 아닌, 이 땅에서 조언 받아야 할 삼의 도움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그의 일생의 성 육신을 삶은 우리에게 희망거리가 아니고 가슴을 건드리는 주제가 아닌 것이다.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 깊이 동의 하는 바이다.

개인적 견해를 말하면 스스로 경험한 미국 이민교회의 경우  (장로교, 연합감리교)도 이러한 시각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현재 섬기고 있는 한인 미 연합감리 교단, 본 교회에서도 이러한 펠라기우스적 관점과 자아중심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중심의 신앙을 안타깝게도 팽배하게 드러난다. 한국교회와는 조금 다르게 예배 출석에 있어 일주일에 주일 오전 한번 교회를 나와 듣는 설교 말씀으로 신앙의 본분을 다했다 스스로 여기고, 설교주제도 냉철하게 분석해 보면 자아성장과 행복추구에 대한 내용이 많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어떻게 우리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 하여 선교사적 삶으로 살 것인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별된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보기 어렵다. 그런 설교를 목회자가 가차 없이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데로 성도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죄, 회개, 전도, 그리스도의 피를 논하지 않아도 교회는 잘 운영이 되고 한인 커뮤니티 장소로써의 역할을 다하며 성도들은 기쁨을 느끼고 편안하게 미국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현실은 어떠한가? 필자의 교회도 호튼 교수가 말한 구원을 위한 자율적이고 심리적인 요법을 처방하는 교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가히 새롭고 꽤 충격적이기 까지 하였다. 필자는 세속주의의 의미를 단순히 찬양이나 노랫말이 현대화 되어가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인 모임에 기도나 경건의 모양 보다는 술, 담배, 유흥이 일삼던 외향적 모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깊이 나아가 현대교회와 개신교 근간을 흔들어 버리는 심각한 깊은 문제였다 는 사실을 모르고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구원에 있어서도 죄의 고백과 그리스도의 영접이 아니라 자율 구원, 이러한 입장을 나타내는 신인협력 설(synergism)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보다는 우리의 자율의지에 따른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 경험을 더 중시하여 얻어지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 모형의 대형 교회는 메가 교회로써 저자는 조엘 오스틴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평하며 그리스도 없는 교회의 대표적인 예로 간주 한다.

형통복음 즉, 조엘 오스틴이 제시 하고 있는 그의 신학과 신자들을 향한 메시지는 도덕론 적이고 심리 요법적인 이신론을 다소 덜 극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누리게 하실 수 있는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철저히 지킨다면 우리가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언만 하라. 그러면 형통이 당신을 따라 온다.”<Page 97>라고 한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이 비판의 쟁점은 오스틴의 메시지가 신학적으로 잘 못되었다 거나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고 생명을 주셨다. 이 땅에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과 도덕이 있다. 그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뜻 안에 살 수 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면 당연히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분이 만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조엘 오스틴의 문제의 본질은 그의 메시지가 펠라기우스 적이든 그렇지 않든, 매주 일요일, 수만 명의 크리스천이 모인 교회 안에서 예배로써 그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점이다. 똑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다른 형태의 예와 시나리오를 가지고 매주 전세계와 주일 예배 설교에 전해지는 것을 꼬집고 싶다. 얼마 전 조엘 오스틴의 인터뷰를 TV를 통해서 보았다. 출연자 조엘 오스틴과, 프로그램의 진행자 사이의 대화, 질문은 이러했다. 질문자는 당신의 메시지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의 죄, 구원에 대하여 다루지 않는 것을 보고 복음적이지 않다라고 판단 하는 많은 신학자들과 보수 크리스천의 물음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오스틴의 대답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형통하고 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전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내가 목사이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죄에 대해 언급하고 설교 할 수 있지만, 난 단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효과적은 은사를 사람들에게 사용할 뿐이다. 목회자 들에게 전해지는 많은 설교의 주제 중에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설교를 하는 것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가장 좋은 은사,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성경에서 발췌하여 이 땅에서 우리가 왜 형통하고 복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아가 발전하고 우리의 꿈을 하나님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는 곳 교회에 성도들이 모이는 이유이고 어떤 말씀이 그 예배 안에 설교로 전해지는가 이다. 성례전이 집행 되어야 하고 우리의 죄인 됨을 매주 느끼고 고백되어져야 할 교회 에서 단순히 희망적인 설교만 듣고 귀가 즐겁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을 쫓아 사는 그리스도 인 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영광의 신학이라 책에서는 칭한다. 주된 인물들로는 보통 유명인사이며 교회가 수적으로 규모로 성장했다. T.D 제이크, 베니 힌, 조엘 오스틴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 이들의 베스트 셀러들을 살펴 볼 때 저자는 그들 안에 이교도 신학이 깔려 있다라고 까지 이야기 한다. 또한 그들의 메시지는 어떤 신학적 사상도 깔려 있지 않다라고 비평한다. 또한 그들이 그런 메시지를 전달 함으로 얻어지는 부와 명예로 써 최고급 차와 요트 최상의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우리 삶의 존재 이유를 행복 추구, 자아실현에 완벽한 목적을 두는 신학 사상에 대해서 비판 할 만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 누군가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제는 그리스도 인으로써 교회 참석의 이유를 복 받기 위해서 형통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미화하는 사상인지를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낙관적인 도덕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기 보단 더 한발 짝 나아간, 구원에 대한 환희와 선교적 관점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마이클 호튼이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를 거짓복음” <page 103>이라고만 단정 짖기에는 그냥 오스틴의 항변도 이해할 만 하다. 거짓복음이 아니라 많은 복음의 이야기 중에 하나의 주제일 뿐이다. 그 낙관주의적 형통주의적 복음에 사람들이 더 귀를 귀 울이고 달콤해 하며, 삶의 목적을 행복하게 누리는 우리의 현실 안에 가치관을 두는 그리스도인들도 비판 받아야 한다는 필자의 생각이다.

또 한가지 책의 내용, 현대교회에서 두드러지는 이머징 교회 운동(Emergent church movement) 에 대한 저자의 언급 중 가장 깊게 와 닿았던 부분은 율법주의와 복음의 혼동이다. 현대 그리스도 인들의 특징 중에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더 이상 집중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들은 판단하기를 이것은 구식 율법 이다. 하지만 율법주의와 율법을 지키는 삶은 확연히 다름을 알아야 한다. 책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것으로 주셨지 요구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 인들이 참고해야 할 조언이 아니다라는 말에 동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제자로써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머전트 교회 운동 (Emergent church movement) 에서 주는 교훈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전하는 교훈과 같다. 즉 더 노력하라.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리더가 되라.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이룩하라. 교리가 아니라 제자 도를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이 단순히 각각 단순한 십계명과 요한 복음 3 16절을 가리키지 않는 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주는 것은 성경의 모든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 주는 것은 성경의 모든 복음이다. 이런 것들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만 깨끗해 질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다. “<Page 151> 멕 클라렌이 전하는 메시지는 교리의 행위로써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명백한 믿음이 있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포스트 모던한 성격에 대해서 놀랍지도 않다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을 서평 하면서 앞서 다루었듯이 호튼 교수가 중점적으로 지적했던 현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펠라기우스와 이머징 운동과 메가 처치의 위험성, 그리고 인기 있는 목회자들의 진정한 복음이 빠져있는 메시지를 다시 정리해 다루어 보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현대 기독교 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기는, 이 펠라기우스 신앙 관과 포스트 모던 사상에서 오는 메시지를 잘 분별하지 못하고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 빠진 교회는 교회존재 자체가 무의미 한 것이다. 단순히 사교집단, 성도가 교회로부터 무언가 누릴 수 있는 제도적 역할을 기대하게 되는 현대 메가교회나 이머징 운동, 현대 기독교 인들에게 더 이상 교회는 예수님 부활 이후 세워졌던 참된 초대교회, 즉 기도하기 힘쓰고 떡을 나누며 그리스도 인으로 살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되는 삶으로의 동참하게 하는 그런 의미로써의 교회는 퇴색되어 버려지고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 호튼 교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저항하라라고 외치나 보다. 우리가 더 이상 걸어 다니는 시체로써의 그리스도 인이 되지 않으려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신앙생활 함에 있어 주체를 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무언가를 제공 받을 수 있어야만 교회에 나아갈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율법을 지킴으로 세상사람들과 분별 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도, 그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배우기를 힘쓰며 교제 하는 매개 채로써 교회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대다수의 현대 교인들이 더 이상 원죄, 속죄, 칭의, 성화, 은혜의 수단을 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 원하면서도 나의 목적 달성과 성공, 나를 돕고 이익관계로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역할, 즉 펠라기우스 사상에 서서히 물들어 지지 않았나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현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인이라 자부 하는 많은 사람들과 또한 목회자를 꿈꾸며 교회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한번쯤은 깊이 다루어 보고 생각해 봐야 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현대 교회들이 복음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아가 야 할 지를 정확히 제시 하는 책이다

끝.